📽️ 루나의 필름 로그 | 2026.03
시카리오 (Sicario, 2015) 선의로 뛰어든 세계가 선의를 용납하지 않을 때
어떤 영화는 관객을 자리에 편안히 앉혀두지 않습니다. 멱살을 잡고 모래먼지 날리는 무법지대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만들죠. 커피 한 잔을 내리고 방 안을 어둡게 한 채 다시 마주한 드니 빌뇌브의 2015년 작 <시카리오>가 바로 그런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숨이 조금씩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총격전이나 폭발 때문이 아닙니다. 주인공 케이트가 자신이 믿었던 원칙들이 하나씩 무력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그 과정 때문이었죠. 저는 오랫동안 복지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규칙을 따르고, 사람을 돕는 일이 옳다고 믿으며 살아왔어요. 그래서인지 케이트의 좌절이 유독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1. 제목이 이미 결말이다 — 시카리오의 어원
'시카리오(Sicario)'는 스페인어로 청부 살인업자를 뜻합니다. 어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히브리어 '시카리이(Sicarii)'에 닿는데, 로마 지배에 저항하던 유대 급진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드니 빌뇌브는 영화 제목 하나로 이미 이 영화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를 다 말해버립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또 다른 불의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FBI 요원 케이트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가 마약 카르텔 소탕 작전에 투입되며 마주하는 건 자신이 알던 규칙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작전을 주도하는 맷과 알레한드로는 목적을 위해 기꺼이 잿빛 늑대가 되기를 자처하죠. "이곳은 늑대들의 도시야. 넌 늑대가 아니잖아." 알레한드로의 이 서늘한 대사는 원칙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는 잔혹한 현실을 관객의 뇌리에 조용히 꽂아버립니다.
2.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 — 아름다움과 폭력이 같은 풍경 안에 있다
시카리오를 수작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축은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입니다.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는 차량 행렬을 공중에서 포착한 장면, 황무지를 실루엣으로만 담아낸 석양, 그리고 야시경 시점으로 진행되는 터널 장면까지 — 그의 카메라는 단 한 번도 과잉되지 않습니다. 특히 작전팀이 저격 준비를 마친 순간 하늘이 가장 붉게 물드는 구도는, 아름다움과 폭력이 같은 풍경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보여줍니다.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마음에 걸립니다.
3. 크리에이터의 귀를 사로잡은 사운드트랙
영상미도 훌륭하지만, 직접 음악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로서 이 영화의 사운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故 요한 요한슨(Jóhann Jóhannsson)이 만들어낸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심장 박동을 닮은 낮고 묵직한 베이스,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와 교묘하게 뒤섞이는 타악기의 리듬은 관객을 쉴 새 없이 불안하게 만들죠.
평소 Lo-fi 음악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사운드를 만들어온 저에게 <시카리오>의 음악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충격이었습니다. 소리 하나, 호흡 하나까지 계산된 이 치밀함은 시각적 잔혹함 없이도 최고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냅니다. 소리가 인간의 감정을 이렇게까지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창작자로서 경외심을 넘어 깊은 공부가 됩니다.
4. 알레한드로 — 이 영화의 진짜 무게 중심
표면적으로 케이트가 주인공이지만 영화의 무게 중심은 베니시오 델 토로가 연기한 알레한드로에게 있습니다. 그는 거의 말이 없습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설명하지 않으며, 그냥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존재만으로 화면을 장악합니다. 알레한드로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과정은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하게 설계된 부분입니다. 그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 관객은 그를 단순한 킬러로 보던 시선을 거두게 됩니다. 빌뇌브는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선과 악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립니다.
마치며 — 서명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저항
영화가 끝나고 방 안에 적막이 찾아왔을 때, 그 서늘한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케이트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표정 — 패배도 체념도 아닌, 그냥 살아남기로 결심한 사람의 눈빛 — 이 오래 선합니다. 저 역시 시스템 안에서 혼자 버텨야 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옳다고 믿은 것이 통하지 않을 때. 그럴 때 케이트가 생각납니다. 그녀는 졌지만,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저항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은 <시카리오>의 묵직한 베이스 대신, 잔잔한 Lo-fi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마음을 달래야겠습니다. 루나의 필름 로그,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
* 루나(Luna)는 이 블로그 운영자의 페르소나입니다. 푸른 눈의 흰 고양이 루나의 이름으로 Lo-fi 음악 채널 Blue Cat Luna를 운영하며 음악과 영화, 일상의 감성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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