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 (Un homme et une femme, 1966) — 20년 만에 마주한 친구의 단발머리에서 다시 만난 나의 영원한 뮤즈
며칠 전, 정말 오래된 친구를 만났습니다. 무려 20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자리였죠. 세월이 흐른 만큼 서로 변한 모습에 어색할 법도 한데, 저는 친구의 머리 모양을 보자마자 입을 뗐습니다. "야, 너 단발머리 하니까 훨씬 예쁘다. 꼭 아누크 에메 같아!"
친구는 쑥스럽게 웃었지만, 제 머릿속은 이미 수십 년 전 그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남과 여>. 당시 저는 주인공 아누크 에메의 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를 마음속에 박제해 버린 탓에, 그 이후로 어떤 여배우를 봐도 시시해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20년 만에 만난 친구의 단발머리 하나로, 그 시절의 저를 통째로 소환해버린 겁니다.
1. 아슬아슬하고 덤덤한 인내의 미학
<남과 여>는 단순히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자 사별의 아픔을 간직한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서서히 서로에게 젖어드는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저는 이 영화의 그 특유의 '덤덤함'이 좋습니다. 보통의 영화들이 격정적인 감정을 쏟아낸다면,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감정을 억누르고 인내하는 모습에서 더 큰 미학을 보여줍니다.
차가운 겨울 바다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나누는 시선, 절제된 대사 속에 숨겨진 뜨거운 진심. 그런 덤덤함이 오히려 보는 이의 가슴을 더 시리게 만듭니다. 여기에 프란시스 레이의 그 유명한 음악이 깔리면 — 다바다바다, 다바다바다 —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완벽한 예술이 탄생합니다.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세련된 연출도, 지금 보아도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196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 이 영화입니다.
2. 왜 나는 아누크 에메를 마음속에 박제했나
단발머리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지적인 분위기에 미쳐 있었습니다. 프랑스 여배우들만이 가진 특유의 몽환적이면서도 단단한 느낌.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눈빛 하나로 화면을 압도하는 그 힘. 요즘 배우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깊이 있는 아우라였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닮고 싶다는 게 아니라 — 저런 깊이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20년 만에 만난 친구를 보며 아누크 에메를 떠올린 것도 그 이유였을 겁니다. 단순히 머리 모양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세월을 잘 견뎌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덤덤하고 우아한 멋이 영화 속 그녀와 닮아있었기 때문이죠. 그날 친구와 밥을 먹으며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참 잘 버텨왔구나, 하고.
마치며 — 가슴속에 박제해둔 당신의 뮤즈는 누구인가요
요즘 영화들은 화려한 그래픽과 자극적인 소재로 가득하지만, 가끔은 <남과 여>처럼 정적인 영화가 그리워집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사랑,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그런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깨닫게 됩니다. 아누크 에메가 보여준 그 절제된 미학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속에서 여전히 넘버원입니다.
누군가를 그토록 동경하고 열광했던 기억이 있다는 건, 인생을 참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가슴속에 박제해둔 인생 배우나 인생 영화가 있으신가요? 어쩌면 잊고 지냈던 여러분만의 뮤즈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처럼 뜬금없이, 친구의 단발머리 한 번에. 루나의 필름 로그,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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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나(Luna)는 이 블로그 운영자의 페르소나입니다. 감성 음악 채널 Blue Cat Luna를 운영하며 음악과 영화, 일상의 감성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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