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드보이의 충격을 넘어,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사랑에 매료되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어쩌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감정의 결을 읽어내는 눈이 생기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라고 하면, 제게는 아주 오래전 <올드보이>에서 느꼈던 그 날것의 충격과 파격이 먼저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헤어질 결심>을 보았을 때는 그 슴슴하고 모호한 전개에 고개를 갸웃했죠. 하지만 묘한 잔상에 이끌려 기어이 두 번을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짙은 안개 같은 슬픔의 소용돌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서사에 마음이 뺏겼다면, 세월을 겪어낸 지금은 이런 류의 깊고 묵직한 인간의 사랑에 속수무책으로 매료되고 맙니다. 살인 사건이라는 서늘한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결국 이 영화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끌림과 붕괴되어 버린 두 남녀의 지독한 멜로 영화였습니다.
(사진 설명: 마침내 붕괴되어 버린 두 사람의 사랑, 그 짙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2. 탕웨이와 양조위, 허공을 응시하는 눈빛의 무게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 '서래' 역을 맡은 탕웨이 배우에게서 단 1초도 시선을 뗄 수 없었습니다. 꼿꼿하면서도 어딘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녀의 자태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제 마음속 오랜 우상인 홍콩 배우 '양조위'가 겹쳐 보였습니다.
탕웨이와 양조위, 두 배우에게는 기막힌 공통점이 있습니다. 굳이 수많은 대사를 내뱉으며 감정을 강요하지 않아도, 그저 허공을 툭 응시하는 그 '깊고 강렬한 눈빛' 하나로 수만 가지 감정을 관객의 가슴에 내리꽂는 힘을 가졌죠.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여인에서, 기어이 자신의 온 마음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한 인간의 얼굴로 변해가는 탕웨이의 눈빛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슬픈 언어였습니다.
3. 정훈희와 송창식의 '안개', 영화를 지배하는 음악의 거대한 힘
그리고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제 가슴을 가장 크게 때린 것은 바로 '음악의 힘'입니다. 영화 전반을 묵직하게 감싸고도는 정훈희, 송창식 가수의 '안개'라는 곡은 단순한 배경음악을 넘어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서사 그 자체였습니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라는 구슬프면서도 몽환적인 가사와 두 거장의 한 맺힌 듯한 목소리가 극장에 울려 퍼질 때, 서래와 해준의 엇갈리는 운명과 겹쳐지며 얼마나 가슴이 먹먹했는지 모릅니다. 장면을 설명하는 대신 음악이 영화의 공기를 지배하게 두는 연출을 보며, 음악이 예술 작품에 얼마나 거대한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새삼 전율을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4. 미결 사건으로 남아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마음
영화가 끝난 후에도 며칠 동안이나 노래 '안개'를 흥얼거리며 서성이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살아가면서 타인을, 그리고 나 자신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속에 '미결 사건'으로라도 남아 영원히 잊히고 싶지 않았던 그 지독하고 숭고한 마음만큼은 오랫동안 제 가슴속을 떠돌 것 같습니다.
한때 박찬욱의 영화가 충격이었다면, 이제는 제 인생에 가장 아스라하고 먹먹한 파도로 남았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저처럼 고개를 갸웃하셨던 분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한 번 더 찾아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두 번째 관람에서 비로소 이 영화가 당신의 가슴을 무너뜨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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